※동북아역사재단 뉴스레터 2013년 6월호 게재.
광개토왕비에 새겨진 ‘국강상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라는 긴 시호는 격동의 세기를 보낸 광개토왕의 생전 모습과 활동을 잘 묘사하고 있다. 414년에 세워진 이 비는 자연석에 1775자에 달하는 장문의 기록을 통해 고구려의 건국과정, 정치사상, 사회경제, 법령, 국제관계 등 고구려 역사의 독자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시에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성을 낱낱이 고발하는 증언록이기도 하다.
1880년경 오랜 잠에서 깨어난 광개토왕비는 일약 국제적 관심이 되어 고구려사를 비롯한 4~5세기 동아시아사 연구의 초석이 되었다. 동북아재단에서 곧 발간될 이 책은 2012년 광개토왕이 승하한 지 1600주기를 맞아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확인하고 이슈들에 대한 재점검을 통해 새로운 연구의 지향점을 모색하기 위해 개최한 학술회의 성과이다.
원석탁본조사및연구

최근에 촬영한 광개토왕비
광개토왕비 연구의 기초는 탁본에 대한 정밀조사와 판독이다. 비문 변조설을 둘러싼 논란이 이진희 씨에 의해 제기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이 설에 경도된 학설도 존재하며 민족적 정서에 편승한 무분별한 생각이 유포되기도 한다.
기조강연을 맡은 다케다 유키오 교수는 탁본 연구의 방대한 업적을 바탕으로 탁본 시기를 묵수곽전본-원석탁본-석회탁본 순으로 분류하고 용지법과 착묵상태에 따라 이를 세분화하여 탁본 편년을 재구성하였다. 그 결과 원석탁본은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비석발견 직후의 [A1유형] 탁본은 종이에 글자를 탁출한 후 나중에 묵시되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사례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또한 [A2형] 탁본은 착묵 용지가 150~160장 정도이며 각 면이 11~12단으로 되어 있어 다소 불착묵 부분이 확인되어 문자가 약간 두께가 있는 점, 현재는 4척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A3형】탁본은 용지는 60매 전후로, 8~9단으로 구성되는 꽤 정밀하게 먹매김되어 있다고 한다. [A4형]은 1889년 중국의 명탁공인 이운종 수탁본으로 용지는 12매, 3단 구성으로 매우 정교한 착묵으로 7탁본이 현존하고 있으나 이것이 가장 오래된 양질의 묵본 자료라고 평가한다. 광개토왕비의 학술적 연구는 이미 원석탁본 시대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 앞으로는 【A형】탁본을 중심으로 관련 자료의 공개와 자유로운 학술 교류를 통해 해석 문제와 묵본 연구를 균형 있고 냉정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제적 연구의 필요성
제1부에서는 광개토왕비의 고고, 금석, 서체, 언어학적 측면에서 다루었다. 조법종 교수는 집안 지역의 역사지리적 공간은 근대 이후의 지형 변화 상황을 조선시대 고지도와 근현대 지도를 통해 그 변화상을 추적해 태왕릉이 광개토왕릉으로 비정될 가능성을 추정했다. 손인걸 선생은 집안지역의 왕릉 등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고구려시대 문물의 분포범위, 보존현황과 유형구조를 확인하고 HM 1호 무덤을 동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등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고광의 박사는 광개토왕비 서체는 서사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고구려의 독특한 양식을 광개토태왕비체로 명명하자고 주장했다. 이우태 교수는 광개토대비는 능비라기보다는 수묘인 연호의 착오를 방지하기 위한 성격이 짙다고 보고, 글자 크기로 볼 때 이 비의 첫 독자는 수묘역을 담당한 국연과 간연을 추정해 원래의 선석에 비문을 새긴 것으로 본다. 권인한 교수는 광개토대왕비문의 국어사적 연구를 통해 한국어 두음법칙의 연원이 적어도 이 비문의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문법사에서도 종결 사용법인 지와 조사용법의 위를 통해 이두발달의 초기 사례에 해당한다는 것을 추정했다.제2부에서는 고구려의 남방제국과의 관계를 논하였다. 쟁점이 되고 있는 신묘년 기사의 해석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남방전선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정당화하는 필법으로 구사된 허구의 삽입구로 규정하고, 안라인수병에 대해서도 기존 해석인 안라가야 병력임을 재확인했다. 비문의 왜에 대해서도 야마토 정권으로 보는 관점이 거의 일치하였다. 하마다 고사쿠 교수는 광개토왕을 계승한 장수왕은 부왕의 치적을 바탕으로 국가운영을 추진했다며 중국의 남북조 대외관계를 배경으로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 제국과 왜국의 국가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새로운자료발견과비교연구
3부에서는 고구려의 북방 관련 주제이다. 이성재 박사는 양서 고구려전에서 후연의 광개토왕 책봉은 북위의 반격에 대비한 일환이며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였다고 말하고 고구려는 이 책봉 관계를 통해 서방에 대한 우려를 줄이고 남방경략에 전력을 다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서영수 교수는 비문의 영락 5년조 파려기사를 분석했는데, 이 사건은 고구려가 후연의 요동거점뿐만 아니라 요서지역 진출의 신호탄이며, 이 기사가 비문 첫머리에 기록된 것은 고구려 대외팽창의 전환기로 의미를 부여했다. 이 밖에 윤명철 교수는 광개토왕의 업적을 현재적 측면에서 국가 발전의 정책으로 의미 부여하고 21세기 한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원석탁본인 수곡본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소장, 1887~1889년 제작)
4부에서 김택민 교수는 고구려의 수묘인 제도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 사료상에 보이는 중국 역대 왕릉의 수릉제도와 수릉 관련 율령 조문을 분석하고 고구려의 수묘조에 보이는 전매금지 조항은 없으며 수묘소도 반드시 천민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라고 양측의 차이를 비교 분석했다. 김현숙 박사는 광개토왕비의 건립 목적에 대해 선조왕 및 부왕의 권위를 배경으로 장수왕의 향후 정치적 구상과 의지를 국내외에 표방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거의 포괄하는 것으로 기존의 연구 성과를 재검토하면서 새로운 의견, 향후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 최근 광개토왕대의 왕도였던 가계에서는 광개토왕대로 추정되는 가계 고구려비가 발견되었고, 수묘인 제도와 관련해 광개토왕비와의 비교분석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향후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치밀한 분석, 관련 분야 간 공동연구를 통해 광개토왕 시대 고구려사의 실상이 구체화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