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1 –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1 - 1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1 - 2 한국시민사 110점
글 한국역사연구회/돌베개

책을 출판하다

1부 선사 시대
2부 고대
제3부 신라와 발해가 통일되다
파트 4 고려
5부 조선

시각적 데이터의 수집 및 소스
왕좌의 계보
참조
찾다


1부 선사 시대

기록이 없는 선사시대인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다룬다.
인간의 기원은 약 700만~60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년 전 아프리카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약 70,000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로 퍼졌습니다.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었던 고대 인류는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된 생물학적 진화를 통해 현대 인류와 비슷해졌습니다. 혼자 걷기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지고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정교해지는 손가락 움직임은 뇌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공구를 사용하고 불을 다루는 것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는 특성이 되었습니다.

집단으로 사냥과 채집을 했고, 의사소통 과정에서 언어가 진화해 업무 효율을 높였다. 인간은 동물을 석기로 사냥하여 고기를 먹거나, 가죽을 사용하고 견과류를 쪼개거나, 동물의 뼈를 부수어 골수를 추출했습니다. 도구의 사용으로 음식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음식 섭취가 고르게 분배되었습니다.
농업은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인구가 늘어나고 마을이 생겨났다. 토기는 음식을 저장, 저장 및 요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음식을 요리함으로써 사람들은 소화를 개선하고 영양분을 더 잘 흡수했습니다.

그러나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은 여전히 ​​나약한 존재였다. 집단으로 이동하는 단계나 정착과 농사를 짓는 단계에서도 사람들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집단을 형성해야 했다. 노동과 분배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고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사시대는 계급차별이 없는 평등사회였다. 그러나 이 평등은 목가적인 이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굶주림과 박탈에 종속된 불안정한 것이었다.

2부 고대

고조선이 건국된 청동기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패권을 다투던 삼국시대까지를 아우른다.
만주와 한반도는 기원전 15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합류했습니다. 청동기 시대로. 금속 도구를 사용하여 농업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이라 칭하는 정치세력이 곳곳에 등장했다. 씨족 중심의 원시사회는 무너지고 계급관계에 기초한 구사회가 시작되었다.

고조선은 이러한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요동과 한서북부를 아우르며 전국시대에는 중국 연나라와 대면할 정도로 성장했다.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서쪽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한나라의 공격을 받습니다.

고조선의 고대 땅은 한 현과 현으로 편입되었고, 그 외곽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이 발달했습니다. 그 중 부여와 고구려는 건국 즈음에 고대 국가로 등장했지만 옥저와 동예는 한나라나 고구려에 예속되었고 삼한은 3세기 중반에 이르러 수십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4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급변하면서 만주와 한반도의 정세도 급변했다.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점령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했고, 마한백제와 진한사로국은 이웃한 작은 나라들을 합쳐 각각 백제와 신라로 성장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넘어 패권을 다투는 삼국시대가 시작됐다.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사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대륙과 맞닿아 있는 만주에서도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고대의 땅은 중앙 평야와 일본 열도뿐만 아니라 먼 몽골 초원과 중앙 아시아 국가를 다루는 국제 문화로 꽃을 피웠습니다.

한국 고대사의 또 다른 특징은 모든 국가가 동일한 정치 발전 시기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정치체제는 연방제나 부서제에서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제로 진화했다. 고구려와 백제는 4~5세기에 중앙집권체제를 재편했지만 신라는 하위체제에 머물다가 6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제3부 신라와 발해가 통일되다

신라 삼국통일, 통일신라시대, 발해의 생성과 멸망을 다룬다.
7세기 초 삼국의 대립이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고구려가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와 여러 차례 큰 전쟁을 치렀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신라는 당과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이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하자 신라는 당군을 몰아내고 7년 전쟁 끝에 대동강 이남을 점령했다.

통일 후 무열왕의 직계 후손들이 왕위에 오르는 100여 년 동안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 지속되었다. 석굴암과 불국사로 대표되는 수준 높은 문화예술도 꽃을 피웠다. 그러나 8세기 후반 이후 진골귀족 사이에 왕위 다툼이 잦아지면서 신라의 지배체제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9세기에 자연재해가 계속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쇠퇴했고 중앙정부의 관리와 통제 능력은 제한적이었다.

신라 사회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구조적 모순도 있었다. 골품제 사회에서 진골은 정치권력과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며 두품계급과 명확히 구분된다. 6두품 이하 관직에의 승진은 직급별로 상한선이 있었고 사회생활에 제약이 있었다. 주민들이 관직을 맡지 못하게 되자 수도와 주민들 사이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졌다.

9세기 후반 농민 봉기는 지역적 불만이 고조되면서 전국적으로 약탈을 통해 혼란과 전쟁을 일으켰다. 후삼국시대는 각기 다른 곳에 출현한 유력한 씨족들이 중앙정부에서 떨어져나와 독립하고, 이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강화한 견훤과 궁예가 새로운 왕조를 선포하면서 열렸다.

한편, 7세기 후반 만주에서 피난 온 고구려인들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의 왕은 스스로를 ‘고려의 왕’이라 칭하며 당과 일본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약 200년 동안 왕위 계승의식을 과시했다. 발해와 신라의 공식적인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아 때때로 경쟁하기도 했지만 발트해 항로를 통해 교역과 교통이 계속되었다.

신라가 멸망하고 후삼국으로 분단되던 시기에 중국도 당나라가 멸망하고 5조 10국이 번갈아 가며 번갈아 가며 격동을 겪었다. 이 무렵 발해는 북방 거란족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그 전에 발해인들은 고려로 유배되었고, 함락 후에는 다른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고려로 이주하였다.

파트 4 고려

10세기 초 고려 건국부터 14세기 후반 조선 건국까지의 기간을 다룬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통일과 공공성 제고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정부는 지역 지도자를 채용할 때 시험제를 도입해 능력에 따라 공무원을 뽑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인민에 대한 재평가와 사회적 분업의 확대를 고려하여 급여수급제도와 계급과 지위를 확립하였다. 또한 초기에는 태봉의 제도를 보완하여 사용하였고, 건국 후 약 60년 후에는 중앙 3성 6부의 제도와 지방의 주현-속현 제도를 형성하여 하나의 전형을 이루었다. 지배 체제의.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라 관료제가 강화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시과제제도가 도입되었다.

11세기 초 거란의 침략이 멈춘 뒤 안정된 대내외 정세를 안고 성장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문화와 예술도 성장했습니다. 특히 유교와 불교, 풍수론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했다. 그들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외부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는 열린 자세를 유지하면서도 자기 문화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개의 이면에는 지배계급이 사익을 지키려 함에 따라 가계가 강화되는 측면도 있었다. 12세기 초부터 사회적 모순이 드러나고 여진이 심해지면서 국제 정세는 불안정해졌다. 민중의 희망은 더욱 강해졌고 이자겸과 묘청의 난이 이어졌고 1170년 무신반란이 이어졌다. 하고 오랫동안 싸웠다.

13세기 중반부터 원나라의 간섭 이후 외압도 거세졌다. 왕은 문공주와 결혼하고 문제는 왕을 폐지하고 정동 행성을 세웠습니다. 왕의 측근과 신하들이 집권하는 정국과 맞물리면서 인사 관리와 농장 확장의 혼란도 심화되었다. 적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 정책을 갱신할 수 있어야 했다. 공민왕 때부터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건국되면서 국제정세가 변하자 성리학을 공부한 신흥유신이 힘을 얻어 개혁을 추진하였다.

5부 조선

조선왕조가 건국된 14세기 후반부터 근대국가가 성립되기 전인 19세기 후반까지를 아우른다.
고려말 혼돈을 청산한 신흥세력은 조선을 건국하고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관료지배를 확대하며 성리학 질서를 확산시키는 방향으로 국가체제 전체를 재편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지배세력의 하나로 훈구와 갈등을 빚던 사림은 16세기 이후 정계를 장악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개의 큰 전쟁을 극복하고 반복되는 내부 분열과 갈등에 대처했다. 여러 떼. 18세기 왕권강화와 탕평정치로 집단간 대립의 고조는 완화되었으나 19세기 지배세력의 부상과 함께 지배질서의 적폐가 적지 않게 드러났다.

고려의 수조 통제가 축소되거나 폐지되면서 조선의 농경 경제는 재산권 기반 지주제로 전환되었다. 이앙과 시비법의 발달로 농업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조선 후기 인구 증가와 간척 제한으로 토지 소유 규모는 전반적으로 작아졌다. 관공서에 예속되어 있던 상업과 수공업은 민간부문의 발전과 함께 점차 활성화되었고, 일부는 국제무역과 연계하여 발전하였다.

조선은 양반 중심의 관료와 신분제도를 확립하고 비양반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양반 내부의 갈등으로 관료가 점차 해체되어 서울과 노론으로 집중되면서 지방 다수 양반의 위상은 하락하였다. 반면 경제적으로 성장한 비양반계층은 양반계층과의 격차를 좁혔다. 그 과정에서 중산층은 관주운동을 펼쳤고, 일부 서민들은 유학자로 성장했으며, 노비제도는 해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상계에서는 다양한 학문적 논쟁을 통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고, 주자의 가례와 종법의 확산과 함께 확립된 부계와 친족의 질서는 하층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일부 지식인들은 사회개혁과 실학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정감록·미륵신앙·동학을 중심으로 한 민중사상이 확산되면서 다양한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의 지배질서가 힘을 잃어가는 사이 곳곳에서 새로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