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 증백 영숙 입기린 협서
백동수 영숙은 기린협에 들어간다고 전하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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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백동수의 의로운 삶
永叔將家子. 其先有以忠죽은 땅, 至今士大夫悲之.
永叔열심히 일하다, 살, 중국 무술. 雖爵祿拘於時命,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而不媿其士大夫也.
영숙이는 내가 연암협에 들어갔을 때 걱정했다.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永叔嘗爲我相居於김강징셴. 산길, 마지막 날, 한 사람이 아니다.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曰: “彼可籬而桑也, 불, 歲可粟千石.” 검토, 바람과 불,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奮臂追之, 隔溪而還.
仍相視而笑曰: “태어나지 않은 삶, 확실한 악마나무 돌 주방자영업자?”
네가 가는 걸 보는 것도 아프지만 내 자신의 상홍이가 더 아파서 슬프지 않다.
이永叔將居麒麟也, 負犢而入, 장기간, 음식이 없다, 沈樝梨而爲醬, 其險阻僻, 遠於燕巖, 豈可比而同之哉.
거리 사이, 감지할 수 없음, 況敢止永叔之去乎?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其人行之, 悲如此, 而却不爲之悲(而却不爲之悲), 其不能去者之尤有可悲可知. 확실한 자격 증명, 如聞擊筑.
『燕巖集』 하나
무사 백동수의 의로운 삶
永叔집사.
영숙은 장수 집안의 아들을 가리킨다. 【장가자(將家子) : 증조부 백시구(白時耈, 1649~1722)가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 황해도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다 -도 , 그리고 평안도 . 그러나 백영숙의 할아버지 백상화는 백시구의 서자였으므로 백영숙은 성씨였다. – 『연암을 읽다』, 223쪽).
其先有以忠死國者, 至今士大夫悲之.
이 선조들 중에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왕대에 일어난 노론과 소론의 권력투쟁)신입 사원辛壬士禍(辛壬士禍) 연루되어 죽는 것을 말한다. 경종은 장희빈의 아들이었지만 몸이 약했고 후계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노론 측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후계자로 내세울 것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연잉군이 왕세자로 즉위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론 측은 또 다시 왕세자의 대리 정리를 요청했다. 그러자 소론은 경종을 보호하면서 노론과 대립하면서 노론이 배반을 모의하고 있다고 항소한다. 그 결과 영의정 총리를 비롯한 노론 장관 4명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고, 수백 명의 노론 인사들이 처형되거나 추방됐다. 신축년(辛丑年, 1721)과 임민년(壬寅年, 1722)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각 한자의 첫 글자를 따서 신임사화라 한다. 연행 당시 백시구는 노론의 수장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과 열애 사실을 자백하라는 강요를 받으며 고문을 당해 숨졌다. 이에 노론 관계자들은 백시구를 의리를 지킨 무사로 칭송하고, 노론의 의리를 지키며 자신을 희생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 『연암독서』, 223~224쪽) 지금은 양반들도 그를 애도한다.
永叔일하다,
영숙은 글과 글을 잘 썼고, 고전에도 정통했다. 당시 서얼을 졸업한 사람은 무과에 합격해도 관직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1772년 영조는 설의 사용을 자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실제로 병조에서 설을 사용한 사례는 영조가 직접 지명한 인물이 한 명뿐이다. 이듬해 영조는 순연도감의 선전관 백동준 등 선전관들을 왕의 명을 가볍게 여긴 일이라며 추방했다. 그리고 군고시에 합격해 선전관 추천 후보 중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당시 백동수도 후보 명단에 있었지만 유배된 백동준은 재종의 친형이라 대신 관직을 맡을 수 없었다. 또 조정 논의에서도 후반 형제간 교류는 허용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경험한 백동수는 기린협에 입성한다. – 『연암을 읽다』, 224쪽)
年少善騎射, 中武擧.
어려서부터 승마와 궁술을 잘해서 무술시험에 합격했다.
雖爵祿拘於時命,
관직과 녹색 월급은 시대의 운명에 달렸지만,
其忠君死國之志, 有足以繼其祖烈,
왕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는 조상의 공덕을 계승하기에 충분합니다.
而不媿其士大夫也.
그는 귀족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영숙이는 내가 연암협에 들어갔을 때 걱정했다.
嗟呼! 永叔胡爲乎盡室穢貊之鄕?
아! 영숙은 왜 온 가족을 데리고 강원도 마을로 갔을까?
永叔嘗爲我相居於김강之燕巖峽.
앞서 영숙은 나를 위해 금천 연암협에 있는 숙소의 지리를 살펴보았다.
산길, 하루의 끝, 혼자가 아닌 사람.
산은 깊고 길은 좁아 하루종일 걸어도 사람을 만날 수 없다.
相與立馬於蘆葦之中, 以鞭區其高阜, 曰:
그들은 갈대 숲에 서서 채찍으로 높은 언덕을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彼可籬而桑也,
“이곳은 뽕나무 울타리가 마땅합니다.
葦而田 歲可粟千石.”
갈대를 태워 밭으로 만들면 1년에 1,000달러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試敲鐵(바람과 불)
시험 삼아 그는 쇠를 치고 바람에 불을 붙였다.
雉格格驚飛, 小麞逸於前.
꿩들은 놀라서 도망갔고 작은 사슴은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奮臂追之, 隔溪而還.
팔을 흔들며 추격했지만 개울에 막혀 돌아왔다.
仍相視而笑曰: 생명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인간의 수명은 100년 미만입니다.
확실한 악마나무 돌 주방者爲哉?”
왜 나무와 돌에 숨이 막혀 꿩과 토끼를 잡아먹느냐?”
네가 가는 걸 보는 것도 아프지만 내 자신의 상홍이가 더 아파서 슬프지 않다.
이永叔將居麒麟也,
이제 영숙은 기린협에서 살 계획이다.
負犢而入, 長而耕之,
송아지를 안고 입장
【기린협으로 가는 길이 울퉁불퉁해서 송아지를 탈 수 없어 등에 업고 다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환한서(後漢書)』 「유곤전(劉昆傳)」에는 유곤이 어지러운 정국을 피해 하남 부덕산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암은 의지가 있는 사람이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깊숙한 곳에 숨는다는 뉘앙스를 표현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 『연암을 읽다』, 229쪽)
키우고 농사짓고 싶습니다.
沈樝梨而爲醬
먹을만한 된장도 없어서 아가리를 불려서 장을 만든다.
其險阻僻, 遠於燕巖,
연암협곡보다 가파르고 좁고 멀다.
豈可比而同之哉.
동일하도록 비교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顧余徊徨岐路未能決去就,
돌이켜보면 나는 갈림길에 서서 방황하며 어디로 가야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況敢止永叔之去乎?
그가 얼마나 더 감히 영숙의 출발을 막겠는가?
吾壯其志, 而不悲其窮.
나는 영숙의 의지가 용감하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의 가난을 슬퍼하지 않겠다.
其人行之, 可悲如此, 而却不爲之悲,
그가 떠날 때 뭔가 서운할 일이 있었지만, 반대로 그는 슬퍼하지 않았다.
其不能去者之尤有可悲可知.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나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운드 節豪壯聞擊筑. 『燕巖集』卷之一
음절은 대담하고 웅장하며 Gao Jianli가 축을 치는 소리가 들립니다.【전국시대 말 위나라가 진나라에 멸망하자 위나라의 자객인 형가가 연나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고점리를 만났다. 류트 연주를 잘하고 군대에서 역할을 하던 경가는 연태자의 부탁을 받고 진왕을 죽이러 나갔을 때 역수강을 건너기 전에 승객들에게 노래를 불렀다. 엄숙한 선율과 사람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왕관을 찌르려는 듯 머리를 곤두세우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야기』 卷86 「刺客列傳」그것은 마치
(논평)
친구 백동수(白東修, 1743~1816)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산계곡으로 이사를 가면서 쓴 증서이다. 백동수가 맡은 캐릭터는 영숙이고 본명은 인재와 야노이다. 그는 평안도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1649~1722)의 서자 백상화의 손자였다. 그리하여 신분상 설에 속해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1789년(정조 13), 오랜 쇠퇴기를 거쳐 장용영 첫 번째 공식이 되십시오 이덕무(이덕영), 박제 된 Jega박재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박천군수 및 박천지사를 역임하였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하다. 박제가도 기린협으로 이적한 백동수에게 장문의 송가를 썼다.
『貞蕤閣文集』 1부 「送白永叔基麟峽序」